로마와 유대의 권력 투쟁
유대의 역사에서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정치적 역동성과 권력 투쟁의 중요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이 글에서는 안티파터와 헤롯 대왕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유대의 권력을 장악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통해 그 권력을 공고히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안티고누스의 시도
유대의 왕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장남 안티고누스는 로마의 강력한 지도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투지와 용기를 가지고 로마에서 탈출하여 고향인 유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유대로 돌아온 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안티고누스는 왕국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대의 중요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움을 재건하고, 유대의 세력을 한데 묶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적 활동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또한 군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안티고누스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도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결국 로마군의 강력한 대응에 부딪혀 실패하였습니다. 로마군은 유대 지역의 반란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다시 로마의 포로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생명이 로마에서 끝났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처형당하고 그의 정치적 생명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남 안티고누스는 마지막 순간에 도망에 성공하여 생존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안티고누스는 유대의 왕국을 되찾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와 맞서 싸우는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하였으며, 그의 투쟁은 유대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과 실패
폼페이우스의 명령으로 로마로 끌려갔던 유대의 왕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장남 안티고누스는 로마에서 탈출하여 유대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알렉산드리움을 재건하고 세력을 규합하려 했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강화했고, 그 과정에서 안티고누스는 아버지를 도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로마군의 강력한 대응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로마군은 유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고, 결국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다시 사로잡아 로마로 압송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처형으로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 났습니다. 반면, 그의 장남 안티고누스는 간신히 도망에 성공하여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안티고누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유대의 왕국을 되찾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로마와 맞서 싸울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얼마 후, 로마에서는 삼두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부자로 알려졌지만, 군사적 명성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는 B.C. 73년부터 3년간 일어났던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며 일시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비해 군사적 경력이 빈약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크라수스는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파르티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로 향하는 길에 예루살렘을 경유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2,000달란트와 8,000달란트에 달하는 금을 약탈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금이 있었던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아시아, 유럽인들이 성전에 많은 헌금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크라수스의 약탈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는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군사를 다 잃고, 전쟁터에서 자신과 그의 아들도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크라수스의 죽음은 로마의 삼두정치 균형을 깨뜨리며, 이후 로마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크라수스가 죽고 난 후, 로마에서는 8년간 갈리아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에 머물며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있던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3.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티파터의 연합
로마 내전의 혼란 속에서 유대의 통치자 힐카누스 2세는 그의 신하 안티파터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힐카누스 2세는 로마의 정치적 상황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폼페이우스보다 카이사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군사적 선택이 아닌, 유대의 장기적인 정치적 안정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안티파터는 유대의 막대한 재정을 활용하여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을 지원했고, 이를 통해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은 유대와 로마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카이사르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도운 유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여러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유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힐카누스 2세의 대제사장직을 재확인하여 그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또한, 안티파터에게 유대의 행정장관(Procurator of Judea) 자리를 부여하고 로마 시민권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안티파터와 그의 가문이 유대 내에서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내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입지를 다질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안티파터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자기 아들들에게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장남 파사엘루스를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파사엘루스는 예루살렘에서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로 인정받았고, 헤롯은 갈릴리에서 큰 도적 떼를 소탕하여 시리아인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공적인 행정은 안티파터 가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안티파터는 힐카누스 2세가 보낸 돈을 마치 자신의 돈인 것처럼 로마에 보내며 카이사르의 신임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동맹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암살은 로마 내에서 큰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고, 그의 후원자였던 안티파터와 유대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의 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부하 안토니우스가 권력 다툼에 들어가면서 유대와 안티파터 가문의 입지는 불안정해졌습니다. 안티파터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새로운 정치적 상황은 이전보다 더 큰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루스와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안티파터와의 과거 우정을 기억하며 파사엘루스와 헤롯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파르티아의 침공과 안티고누스의 도전은 유대의 정치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4. 로마의 권력 투쟁과 헤롯의 부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후, 로마는 큰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틈을 타 카시우스는 시리아로 망명하여 스스로 시리아의 총독이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모았습니다. 시리아와 유대 지역에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카시우스는 유대에서 조공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위해 안티파터는 카시우스를 도와 조공을 거두었고, 로마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열광적인 유대인 말리쿠스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안티파터의 죽음은 유대 내에서 큰 정치적 공백을 남기며 그의 아들들, 파사엘루스와 헤롯에게 큰 도전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안티파터의 죽음 이후,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 권력 투쟁은 로마의 미래뿐만 아니라 유대의 정치적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의 정치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을 유대의 분봉 왕으로 임명하며 그의 권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헤롯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으며, 유대 내에서 그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애굽으로 내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유대의 유력 인사 100명은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헤롯을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신뢰는 매우 깊었기 때문에 이들의 고소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는 헤롯이 유대 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파르티아와 안티고누스는 유대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 침공에서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와 파사엘루스는 생포되었으나, 헤롯은 가까스로 도망쳤습니다. 힐카누스 2세는 신체가 온전해야만 대제사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안티고누스는 그의 귀를 잘라 이 자격을 박탈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힐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직을 잃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파사엘루스는 포로로 잡힌 후, 헤롯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파사엘루스는 동생 헤롯의 도망을 확인한 후, 스스로 돌에 머리를 박아 자결했습니다. 헤롯은 이두매, 펠루시움, 알렉산드리아, 밤빌리아, 로도스, 부른두시움을 거쳐 로마로 도망쳤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헤롯은 안토니우스를 만나 자신을 유대 왕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막대한 금액을 약속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의 정치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와 로마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유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적 전략을 통해 안티고누스를 사로잡았습니다. 로마의 법에 따라 안티고누스를 로마로 압송해야 했으나, 헤롯은 로마가 안티고누스를 살려둘지 걱정되어 안토니우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그를 죽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국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참수당했습니다. 이로써 대제사장직과 왕의 통치권을 함께 가졌던 하스몬 왕조는 126년 만에 완전히 끝나고, 유대의 권력은 이두매 출신의 헤롯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통치는 유대 내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그는 이후 유대 왕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헤롯의 부상은 유대의 정치적 역학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의 통치는 유대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론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 헤롯 대왕은 유대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티파터의 정치적 연합과 헤롯의 뛰어난 정치력은 로마와의 관계를 통해 유대의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유대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로마 제국 내에서 유대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헤롯 대왕의 통치는 유대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유대 역사와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안티파터와 헤롯 대왕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전략과 로마와의 관계는 유대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후대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유대와 로마 간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를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