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의 세계화

애굽(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는 고대 이집트에서 약 300년 동안 지속된 헬레니즘 왕조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프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프톨레미 소테르는 애굽을 40년간 통치한 후, 그의 아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Ptolemy Philadelphus, B.C.283~246)에게 왕좌를 물려주었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 LXX)이라는 유산을 남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헬라어 70인역은 구약성경의 세계화에 기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블로그 글에서는 헬라어 70인역의 탄생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의의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프톨레미 왕조와 프톨레미 필라델포스

프톨레미 왕조는 고대 이집트에서 약 300년 동안 지속된 헬레니즘 왕조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프톨레미 소테르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프톨레미 소테르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제국이 분할되면서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프톨레미 소테르는 기원전 305년에 스스로를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하고 프톨레미 1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군사와 행정 체제를 구축하며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프톨레미 소테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를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이를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와 이집트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프톨레미 소테르는 이 도시를 통해 이집트를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알렉산드리아는 번영을 누리며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프톨레미 소테르의 뒤를 이은 아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Ptolemy II Philadelphus, B.C. 283~246)는 그의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이집트를 통치했습니다. 필라델포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40년간 왕좌를 지켰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그의 별명 ‘필라델포스’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형제애를 강조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형제 간의 우애를 중요시하며, 이는 그의 통치 철학에도 반영되었습니다. 필라델포스는 경제와 무역을 발전시키고,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무세이온(Museum)을 확장하여 지식과 학문의 발전을 장려했습니다. 특히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uagint, Lxx)을 남긴 공로로 역사에 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의 번영과 문화적 배경

당시 애굽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로, 문화와 패션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와 맞먹는 규모로 발전한 이 도시는 스트라보(Strabo)에 의해 “인간 세계의 가장 거대한 백화점”으로 묘사될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이 도시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며 번영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더 이상 히브리어를 읽거나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서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인 코이네(Koine)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많은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회당 예배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위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는 70인역 번역 작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도서관에 더 많은 좋은 책들을 소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도서관에 소장하고자 했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인 데메트리우스 파레리우스(Demetrius Phalerius)와 협력하여 이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데메트리우스 파레리우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수집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50만 권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이러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유대의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자 했습니다. 이는 결국 구약성경 전체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 제국을 통해 성경의 세계화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3. 70인역 번역의 과정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유대인의 율법서가 헬라어로 번역될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자 했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구인 아리스테우스(Aristeus)에게 유대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문제를 상담하였고, 이는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많은 유대인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수는 1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이는 다소 과장된 숫자일 수 있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아리스테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대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국고에서 속전 460달란트 이상을 지불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일은 조서가 공포된 지 7일 만에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 노예들이 해방되자,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번역 작업은 시작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당시까지도 율법은 주로 구전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애굽에는 정확한 율법 사본이 없었습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유대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유대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과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은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72명(혹은 70명)을 선발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부터 번역을 시작했고, 후에 구약의 다른 부분도 번역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후대에 ‘젭투아진트'(Septuagint, LXX, 70인역)라는 라틴어 칭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론

프톨레미 필라델포스의 헬라어 70인역 번역 프로젝트는 단순한 문서 작업을 넘어선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입니다. 필라델포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 번역 작업을 추진했으며, 이는 구약성경의 접근성을 크게 향상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발전과도 맞물려, 고대 세계에서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70인역 번역은 종교적, 문화적 융합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에게도 성경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교류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이후 기독교의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국 프톨레미 필라델포스와 70인역 번역 작업은 구약성경의 세계화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필라델포스의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의 개방적인 통치 철학은 알렉산드리아를 번영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성경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은 오늘날에도 성경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전파되는 작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70인역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인류의 지적 및 영적 유산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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