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 유대 종파의 형성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유대 역사의 중요한 시기인 마카비 혁명 초기, 하시딤과 마카비 일가는 연합하여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에 대항했습니다. 이 동맹은 마카비 일가가 하시딤의 새로운 율법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통치 시기에 이르러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 간의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유대 사회는 세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사두개파(Sadducees), 바리새파(Pharisees), 그리고 에세네파(Essenes)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세 종파의 형성과 특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사두개파의 형성과 특징 및 기원

사두개파는 주로 부유한 귀족층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제사장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두개인은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돈 많은 상인, 정부 관리 등 다양한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두개파는 종교 단체보다는 사회적 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파의 명칭은 솔로몬왕의 제사장이었던 사독(Zadok)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와, ‘의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차도크'(sadowg)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했으며, 하스몬 왕가와 로마 제국과도 결탁하여 유대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거부하고 오직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했습니다. 사두개파는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며, 영혼 불멸과 섭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울타리’, 즉 ‘장로의 전통’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와 달리 사두개파는 메시아 대망과 예견을 촉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합병했을 때, 유대의 공식 대표는 대제사장이었으며, 이 역할을 주로 사두개인들이 맡았습니다. 그 결과, 사두개파는 여전히 지배 계급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파는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2. 바리새파의 형성과 특징 및 기원

바리새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분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 운동에 가담했던 자들로, B.C. 164년 예루살렘 성전이 재봉헌될 때까지 유다 마카비를 지지했으나 이후에는 종교적 자유만을 원하며 마카비 가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바리새파는 그 기원과 효시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바리새’라는 명칭은 ‘구별되다’ 혹은 ‘~로부터 분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Parch)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의 후예로, 마카비 혁명이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정치적 패권 다툼으로 변질되자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바리새파’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요한 힐카누스의 통치 기간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의 열렬한 고수자로, 그들의 교리 중 일부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 왕국, 사후의 생명, 마귀와 천사의 이중성 등입니다. 바리새파는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과 구전법(Oral Laws)을 포함한 모든 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구전의 계율을 모두 지키며,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천사와 악마의 존재, 메시아 대망 등을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의식의 준수에 있어 뛰어났으며, 대중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았지만, 정치권력은 갖지 못한 경건한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적 종파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확한 해설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일반 유대 평민들과 달리 율법의 사소한 부분까지 엄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파의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를 비판하고 견제했습니다.

3. 에세네파의 형성과 특징 및 기원

에세네파는 하시딤의 신앙고백을 계승한 종파로, 마카비 혁명과 B.C. 88년 알렉산더스 야나이우스와 바리새파 간의 전쟁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 율법의 준수가 진정한 예배라고 믿었습니다. 에세네파는 마카비 혁명과 알렉산더스 야나이우스와 바리새파 간의 전쟁 논쟁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교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믿고, 대신 율법의 준수가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에세네파는 유대의 세속 정치와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에세네파는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을 본거지로 하여 수도 원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재산을 공유하며, 예배와 독서, 공동 식사를 중요한 행사로 삼았습니다. 에세네파는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해 두루마리 사본인 쿰란 문서들은 에세네파와 관련이 깊습니다. 쿰란 문서들은 에세네파의 초기와 후기 문서로 나뉘며, 후기 문서에서는 묵시문학적인 사상이 지배적입니다. 쿰란 문서들은 ‘의의 교사’의 영향과 위경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묵시문학적인 자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구조 속에서 그들의 엄격한 전통을 유지하며,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는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종파로, 각각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부유한 귀족층과 제사장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바리새파는 하시딤 운동에 가담한 자들의 후예로, 종교적 자유와 율법의 엄수를 강조했으며,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세속화에 반발하여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며, 묵시문학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 종파는 유대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역사는 오늘날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유대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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